[ 기획연재-대한민국 2인자 정치사] 참여정부 문재인

대통령과 '끈끈한 정'으로 엮인 동지들..권력 쓴맛 절감

문흥수 기자 | 기사입력 2013/10/21 [10:30]

[ 기획연재-대한민국 2인자 정치사] 참여정부 문재인

대통령과 '끈끈한 정'으로 엮인 동지들..권력 쓴맛 절감

문흥수 기자 | 입력 : 2013/10/21 [10:30]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누리던 정권 2인자. 역대 대통령들은 조직이나 관료보단 친인척이나 자신의 복심 2인자를 통해 막후정치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 정치사에선 보통 2인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베여 있는데, 이는 마치 자신이 절대 권력을 가진 듯 욕망을 앞세우면서 호가호위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권불십년. 절대권력 2인자의 자리 역시 영원할 순 없다. 1인자가 권좌에서 내려오며 갖은 수난을 겪었듯, 2인자 역시 자연스레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브레이크뉴스>에서는 8회에 걸쳐 대통령의 수족을 자처하며 막후 권력을 누렸던 역대 정권 2인자의 삶의 명암을 조명해 본다.

 참여정부 실세 ‘문재인’

 
▲ 문재인 전 비서실장    © 브레이크뉴스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은 단연 청와대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 전 대선후보다.


문재인 의원은 1982년 노 전 대통령이 부산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때부터 함께 해온, 노 전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자 동지였다. 노 전 대통령이 정치를 안하겠다던 문 의원을 설득해 청와대 민정수석을 두 번이나 맡기고, 비서실장까지 제안한 것을 감안하면 문 의원은 노 전 대통령과 딱딱한 상하관계 보다는 끈끈한 정으로 뭉쳐있었다는 게 정가의 일반적인 평가다.

이 때문에 사실 실세라는 표현보다 ‘노 전 대통령의 친구였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기도 한다. 문 의원은 사시 동기인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소개로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나게 됐으며 부산에서 인권‧노동 변호사로서 젊은 날을 함께 보냈다.

문 의원은 자신의 자서전 <운명>에서 노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에 대해 “같은 과(科)라는 동질감을 느꼈다. 그 만남이 내 평생의 운명으로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후 두 사람은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1987년 6·10 민주화운동 현장을 함께 누비는 등 가깝게 지내다가 노 전 대통령이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를 따라 정치권으로 옮겨 가면서 다른 길을 걷는다.

이후 이들이 다시 뭉치게된 것은 2002년 대선 시절이다. ‘친구’ 노무현이 대선 후보로 나오자 문 의원은 부산선거대책위원회 본부장을 맡으면서 정치권에 첫 발을 담그게 된다. 이때부터 문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의 ‘조언자’ 역할을 해왔다. 노 전 대통령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때마다 친구 문재인에게 의견을 묻고 상의했다고 한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에는 노 전 대통령과 사이가 각별했다는 이유로 문 의원은 자연스레 실세가 됐다. 하지만 여타 ‘2인자’처럼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비서실장 당시에도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극도로 우려해 민원이나 청탁을 받을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또 일로 엮인 사람들 이외에는 잘 만나지 않는 등 자기관리에도 철저했다. 자신을 만나고 싶어 청와대 인맥을 알음알음 동원했던 고등학교 동창생을 문전박대한 일화도 정치권에선 유명하다.

그런 그 였지만 측근 비리 사건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문 의원이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으로 있던 시절 터진 ‘박연차 게이트’와 친형 노건평씨 사건 등으로 인해 문 의원 역시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좌희정 우광재’ 盧의 영원한 우군

 
▲ 이광재-안희정     © 브레이크뉴스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두 사람은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왼팔, 오른팔 역할을 한 인물로 익히 알려져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대표적인 친노 486세대로, 노 전 대통령의 영원한 정치적 동업자에서부터 리틀 노무현 등의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노 전 대통령이 처음 정치에 입문한 80년대 후반부터 보좌진을 맡았던 이광재 전 지사는  청와대에 입성해서도 노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내는 동안에는 ‘노 전 대통령 자신보다 노 대통령을 더 잘 알고 있는 측근’이란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이 전 지사는 실제로 참여정부의 권력분산 아이디어나 청와대 조직개편, 각종 인사, 지역 사업 유치 등에 있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청와대 및 정부 각료 개각시 ‘이광재 파워’가 막강했다는 전언도 있다.

그러나 당시 천정배 민주당 원내대표가 "정보와 권력을 독점한 문제의 핵심인물을 경질해야 한다"면서 그의 퇴진을 요구, 결국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청와대를 나와야만 했다.

안희정 지사는 이광재 전 지사보다 '정치적 부침'이 심했다. 참여정부 출범 일등공신이나,  불법 대선자금 수수 혐의로 인해 구속수감되는 아픔을 겪었다.

참여정부 출범 초 노 전 대통령은 방송에 나와 “안희정은 나의 동업자로 나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언급해 확실한 자기사람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이 직접 자신의 ‘정치적 동업자’임을 강조하는 등 안희정을 구하기 위해 체면 가리지 않고 두 팔을 걷어 부쳤음에도 안 지사는 결국 2003년 12월 불법 대선자금 수수 혐의로 영어의 신세가 됐다.

안 지사는 불법 대선자금 수수 혐의로 구속됐을 때 노 전 대통령은 안타까운 심정을 감추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 지사는 출소 이후 대통령에 폐를 끼칠 수 없다며 어떤 공직도 맡지 않고, 민주당에서 한직(閑職)을 맡아 했다.

이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은  안 지사에 대한 ‘마음의 빚’이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참여정부의 대선자금 문제를 혼자 짊어지고 옥고를 치러야 했던 만큼 그에게 늘 마음의 빚을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권 창출 ‘일등공신’들이었고 ‘좌희정 우광재’로 불릴 만큼 노 전 대통령과 가까웠지만 참여정부 내내 특별한 득을 누리진 못한 케이스다.  

이로인해 일각에선 이들이 보이지 않게 ‘2인자 역할’을 했고, 권력의 단맛보다 쓴맛을 더 많이 봤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더욱이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정권을 넘겨준 이후에는 '盧의 후원자' 박연차 태광그룹 회장과 불미스런 돈거래로 법적 처벌을 받아야 했으며 각종 잇권 사업에 개입한 혐의도 포착돼 또 다시 구속수감 신세를 면치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의 신임 속에 '양날개'로 군림했음에도 검찰의 사정권 앞에선 자유롭게 날 수 없었다.

 kissbrea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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