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추모 행령>DJ와 재계의 인연 '빛과 그림자'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특집- 대기업 동정 스케치

송경 기자 | 기사입력 2009/08/21 [17:04]

<재계 추모 행령>DJ와 재계의 인연 '빛과 그림자'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 특집- 대기업 동정 스케치

송경 기자 | 입력 : 2009/08/21 [17:04]
“아! 김대중….”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그는 한국 정치사·경제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침몰해 가던 ‘한국호’를 위기로부터 구해냈다는 점에서다. 지난 1997년 구제금융(imf) 위기가 몰아닥친 여파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내몰렸던 한국의 경제회생을 위해 김 전 대통령이 혼신을 다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신용카드 남발 등 적지 않은 상처 또한 남긴 것 역시 현실이다. 그런 김 전 대통령을 떠나 보낸 재계가 큰 슬픔에 잠겼다. 국가의 큰어른이자 한국 정치사의 거목, 한국 경제를 되살린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국내 재계의 내로라 하는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실 정치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재계의 관계를 돌이켜보면 좋은 인연보다는 좋지 않은 인연이 더 강하게 작용할 법한 ‘연’을 갖고 있다. 김 전 대통령 서거로 재계와 그와의 관계를 되짚어봤다.
 
imf 위기 때 ‘한국호’ 구한 dj, 현대·삼성·대우·lg 그룹에 상처 안겨
조석래 효성 회장, 전경련 회장단과 조문…박삼구·박찬법 회장 나란히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인이다. 그것도 죽을 고비를 수 차례 넘긴 ‘투사형 정치인’으로 대통령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행적으로만 놓고 보면 재계와 연이 닿을 만한 뚜렷한 족적은 없어 보인다.

김 전 대통령이 재계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은 것은 집권 하면서부터다. imf 환란으로 국가경제의 근간이 휘청거릴 때 집권한 김 전 대통령은 재계에 적지 않은 고통을 남겼다.
 
▲  김대중 전 대통령 국회 빈소 찾은 삼성그룹 사장단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김 전대통령과 재계 인연은?

국민의정부 시절. 김 전 대통령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재벌개혁과 ‘빅딜정책’은 재계와 파열음을 낼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수 십년간 지켜왔던 재계의 지형도가 일대 변화하는 계기가 됐다. ‘대마불사’가 통하지 않게 됐던 것도 따지고 보면 이때부터다. 이때만 생각하면 재계는 김 전 대통령에게 향했던 차가운 시선을 거둘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 전 대통령은 투사형 정치인기도 했지만 <대중경제론>을 집필할 만큼 경제분야에도 뚜렷한 철학과 원칙, 소신을 겸비한 정치인이었다. 그만큼 경제를 잘 아는 정치인이 또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외환위기로 많은 기업들이 생사존망의 기로에 섰을 때 김 전 대통령은 그룹 총수들에게 이같이 당부했다. “경영역량을 주력 핵심사업에 집중해 달라”고.

김 전 대통령의 간청에도 재계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이후 재계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던지, 김 전 대통령은 다시 경제단체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력한 구조조정을 촉구했다. 아울러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추라고 한술 더 뜨며 재계를 압박하기 시작했던 것.
 
정몽구 현대차 회장, 상주들에게 애도 표시한 뒤 빈소에서 ‘깊은 침묵’
북한 방북 마치고 성공리 귀환한 현정은 회장, 이희호 여사 손잡고 위로

이수빈 등 삼성그룹 사장단 16명 단체 조문…허창수 gs회장도 명복 빌어
재계 총수들 dj 빈소 조문과 별도로 대기업 장례기간 중 애도 분위기 동참


당시로선 경천동지할 법한 경영 투명성 제고와 상호보증채무 해소, 재무구조 개선, 업종 전문화, 경영자 책임강화 등 5개항의 실천과 제2금융권 경영지배구조 개선, 순환출자 및 부당내부거래 억제, 변칙상속 차단 등을 담은 ‘5+3’ 원칙도 제시했다.

정부의 몰아세우기가 통했는지, 결국 재계는 5대그룹, 8개 업종 빅딜안을 내놓았고, 현대전자와 lg반도체를 합병해 단일법인을 설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자동차와 조선·철강·건설중장비·공작기계업종과 울산 및 여천 석유화학단지의 구조조정안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말이 좋아 ‘빅딜’이지 결과만 놓고 보면 성공으로 보기 힘들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것이 사실이다. 김 전 대통령이 외환위기로부터 한국을 구해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상처를 남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표적인 예가 현대그룹과 lg그룹 간의 신경전 끝에 lg가 반도체를 내놓은 꼴이 되고 만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합병건을 꼽을 수 있다.

현대전자는 결국 막대한 적자에 시달리다 현대그룹 워크아웃 과정에서 주인이 채권단으로 바뀌는 비운을 맞이했고, 구조조정을 거쳐 현재의 하이닉스반도체로 탈바꿈은 했지만 아직까지 제 주인을 찾지 못한 상황이다.

삼성과 대우 간의 빅딜 역시 실패로 귀결됐다. 각각 보유하고 있던 전자와 자동차를 한쪽에 몰아주는 것을 골자로 했던 삼성과 대우 간 빅딜의 부산물이었던 삼성자동차는 법정관리 신청을 거쳐, 프랑스 르노로 넘어갔다. 대우는 그룹이 통째로 워크아웃에 들어가 공중분해되는 비운을 맞이하고 말았다.

대우자동차는 제너럴 모터스(gm)로 넘어갔지만 주인인 gm이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구조조정의 위기를 겪고 있으며, 대우전자는 하이닉스반도체와 마찬가지로 아직 주인을 찾지 못했다.

외환위기 시에 우리 경제 체질을 강화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업적을 남긴 것만은 분명하지만 분야를 좁혀, 재계의 빅딜정책은 절반의 성공에도 못미치는 결과를 남기고 만 셈이다. 김대중 정부의 빅딜 정책은 현대·삼성·대우·lg 등 국내 유수의 재벌들에 적지 않은 상흔만 남긴 상처뿐인 영광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상처 받은 재계가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맞아 그를 추모하는 행렬에 적극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정을 아는 이들이라면 격세지감을 느낄 법한 일이다. 외환위기 환란 극복이라는 그의 업적 앞에 개별 그룹들의 이해관계는 그리 큰 일이 못됐던 것 같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알려진 8월18일. 재계는 충격을 감추지 못하면서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는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에 큰 발자취를 남겼고, 외환위기 때는 해외투자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 경제의 조기 회복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전경련은 “경제계는 김 전 대통령의 나라사랑 정신을 높이 기리며 어려운 경제상황을 조기에 극복하는데 매진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김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에 애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고 밝혔고, 대한상공회의소 역시 “민주주의의 정착과 남북화해협력을 위해 평생을 바쳤고, 외환위기시에는 우리의 경제체질을 강화하고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고 고인을 기렸다.

집권기간 중 재계와의 껄끄러웠던 관계도,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서운함도, 억울함도 이제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함에 따라 과거지사가 되고 만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를 극복한 대통령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재계 총수들 잇따라 조문행렬

김수환 추기경 선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이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또 다시 많은 재벌그룹 총수들이 조문행렬에 나서면서 평소 잘 드러내지 않던 모습을 노출했다.

재계 지도자 중에서는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단이 제일 먼저 조문에 나섰다. 손경식 회장의 조문에는 이용구 대림산업 회장, 이운형 세아제강 회장, 이인원 롯데쇼핑 사장, 이종희 대한항공 총괄사장 등이 함께 했다.

조석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이준용 대림회장과 김윤 삼양사 회장, 정병철 전경련 부회장 등 회장단과 빈소를 찾아 애도했고, 최근 형제의 난으로 재계로부터 주목받고 있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박찬법 회장과 박삼구 명예회장도 나란히 조문해 눈길을 끌었다.

김 전 대통령의 유해가 국회 빈소에 안치된 다음날인 8월21일.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은 오전 6시45분께 장남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과 김동진 현대모비스 부회장 등 그룹 임원 9명과 함께 빈소를 방문, 김 전 대통령의 영전에 헌화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정 회장은 상주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한 뒤 10여 분간 빈소에서 깊은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가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연은 보통이 아니지 않은가.

거슬러 올라가면 선대 회장이자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이후 현대그룹을 중심으로 한 대북사업은 김대중 정부 들어 활기를 띠었지만, 동생 정몽헌 회장은 참여정부 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운을 맞이하게 됐다.

아마도 빈소를 방문했던 그 짧은 10분 동안, 북한을 매개로 해서 역대 정부들과 ‘연’을 맺은 현대가의 질곡의 역사가 주마등처럼 지나쳤을 것이다. 이런 회한을 뒤로 한 채 정 회장은 수행한 임원들과 양재동 사옥으로 차를 돌렸다.

최근 북한 방북을 성공리에 마치고 귀환해 남북관계 해빙의 전기를 마련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이날 오전 9시30분께 조건식 현대아산 사장, 김성만 현대상선 사장 등 사장단 10여 명과 함께 빈소를 찾아 애도했다. 정몽구 회장과는 약 3시간 가량의 시차를 두고 방문한 것. 불편한 관계를 고려한 듯한 행보로 여겨지는 대목이다.

현 회장은 김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의 손을 잡고 위로를 하는 등 상주들에게도 조의를 표한 뒤 조의록에 이름을 쓰고 빈소를 곧바로 떠났다.

삼성그룹 사장단도 같은 날 국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을 비롯한 삼성사장단은 국회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 빈소를 방문, 조문하고 유가족을 위로했다. 앞서 삼성그룹은 이건희 전 회장과 임직원 일동 명의의 조화를 빈소에 보낸 바 있다.

이날 조문에는 이 회장과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이상대 삼성물산 부회장, 김징완 삼성중공업 부회장, 임형규 삼성전자 사장, 최도석 삼성카드 사장 등 사장단 16명이 동행했다.

앞서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8월20일 오후 계열사 사장단과 함께 서울광장에 차려진 빈소를 방문해 김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었다.
 
삼성, 축제행사 중지 발빠른 행보

재계 총수들이 개별 또는 사장단을 대동해서 김 전 대통령 빈소에 조문을 나선 것과는 별도로 각 그룹별로 김 전 대통령의 장례기간 중 애도 분위기에 적극 동참하는 분위기였다.

그 가운데서도 역시 삼성그룹이 눈에 띄는 행보를 보였다. 삼성그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 가장 빠르고 민첩하게 움직여 ‘역시 삼성’이라는 탄성이 나오도록 하는 주도 면밀함을 보였다.

지난 8월19일. 서울 서초동 사옥. ‘수요 사장단 회의’가 열리는 회의장에는 김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 전해진 다음날이어서 그런지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회의를 주재한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뜻의 묵념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이 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의 장례기간 중에 각 계열사의 축제성 행사를 전면 중지하거나, 중지가 어려울 경우 최대한 축소해 시행하는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계열사 최고 경영자들에게 당부했다.

아울러 장례 기간 중에는 가급적 화려한 색상의 옷을 피하는 등 경건하게 보내줄 것을 임직원들에게 당부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이 같은 방침은 각 계열사에 즉시 시달됐다. 각 계열사들은 장례기간 중 추진중인 행사를 검토해 중지나 축소 여부를 결정하는 한편, 공익적인 행사에 한해서는 예정대로 추진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한발 더 나아가 삼성그룹은 내부 인트라넷인 ‘마이싱글’ 초기화면에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추모시’를 올렸다. 삼성이 게재한 시는 김용택 시인 작품인 ‘먼 산’이다.

다른 기업들도 애도 분위기에 적극 동참하는 열의를 보였다.

현대백화점은 8월21일 개점한 신촌점 영패션 전문관인 ‘유플렉스’ 개관기념행사로 준비했던 각종 이벤트를 모조리 취소하고 개관행사를 조용하게 치렀다. 전직 대통령의 국장 기간임을 감안해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통상 유통업체의 개관행사는 온 동네가 떠나가 정도로 뻑적지근하게 열리는 것이 보통인 것을 고려할 때 용단을 내린 것이다.

역시 아이파크몰도 개점 3주년을 기념해 사은행사와 함께 진행하려던 축제성 이벤트를 연기했다. gs홈쇼핑은 장례기간 중에 지나치게 경쾌한 댄스곡과 랩 등의 배경음악 방송을 자제하는 등 애도행렬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일부 몰지각한 기업들도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장례기간 중 신차 발표회를 가진 gm대우가 대표적이다. gm대우는 8월19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차세대 경차인 ‘마티즈 크리에이티브(matiz creative)’의 신차 발표회를 가졌다. 물론 오래전부터 계획돼 있던 회사차원의 신제품 런칭 행사였다는 점에서 정상참작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gm대우는 이날 행사에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은 레이싱 모델들을 대거 동원해 클럽 파티 형식의 신차 발표회를 강행했다는 점에서 비난을 자초했다는 지적이다. zizi8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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